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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Yearning#1

[19세기 영국배경 판타지]하인 국×백작 뷔

 "아버지. 저 이 애로 하고 싶어요."

 "이정도면 괜찮은거니?"

 "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단정히 정장을 갖추어 입은 소년은 조막만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왜소한 몸에 아직 맞지 않는 큼직한 케이프가 달린 잿빛 코트가 어깨 밑으로 흘러 내려가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아버지가 흉터 투성이에 굳은 살이 듬성하게 박힌 투박한 손을 움직여 옷 매무새를 다듬어 준다. 자신보다 한 뼘은 훌쩍 넘을 것 같은 그를 올려다보며, 옅게 얼굴에 웃음기를 띄우는 소년이었다. 그것에 응답하듯 잠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던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이 곳의 주인을 불렀다.

 "이 애로 주시게."

 "네, 백작님. 보는 눈이 참 좋으십니다! 참 귀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열쇠를 서둘러 꺼내면서도 이 놈을 구하느라 애를 썼다며 쉴새없이 앵앵거리는 주인장의 말을 무시한 채, 그 소년은 자신보다 조금은 키가 작은 듯한 흑발의 소년을 녹슨 철창 틈으로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소년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물건들과 다르게 살려달라 애원하는 눈빛이 아니라, 한 없이 맑은 검은빛 눈동자로 앞의 자신을 비추며. 서로 마주한 눈을 두어번 깜박거리자 어느새 그 흑발의 소년은 돼지 우리 같던 그 은빛 감옥에서 나와 흘러내리는 코트를 지닌 그의 코 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목덜미 부근이 잔뜩 늘어난 때 탄 면티를 입었는데도 깨끗하게 드러난 하얀 목선이 그 검게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선명히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로 보아 씻지 않은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역한 냄새는 커녕 바로 빨은 듯한 모직물의 푹신한 향기가 났다. 마치 소년이 어릴 때 숨바꼭질을 위해 숨어 들어갔던 세탁실의 그 냄새처럼. 소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일그렸다. 고작 물건 주제에. 그 얼굴을 눈치챘는지 눈치빠른 주인은 황급히 소년의 눈 밖으로 그 꾀죄죄한 소년을 데리고 갔다.

 "아이는 씻겨서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애야, 가져가고 싶은 짐 있니?"

 "..."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채 묻는 근육질의 털보 주인을 큰 눈으로 일순간 바라보던 흑발의 소년은 고개를 내리저었다.

 "이름이 뭐니, 꼬마야?"

 소년의 아버지는 키다리같이 호리호리한 큰 몸을 접어 고개를 푹 숙인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한없이 어린 소년은 괜시리 질투심이 일어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을 눈으로 흘겼다. 아버지가 저런 것 때문에 귀한 몸을 숙이시다니.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흑발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점잖은 신사의 말끔한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한참동안 자그마한 입을 열려다 다시 닫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 신사는 주인에게로 얼굴을 돌려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끄럼이 많은 아이인가 보군요."

 "네. 그렇지만 일도 잘하고. 얼굴도 반반하니, 아마 후회 없으실겁니다!"

 덥수룩하게 난 턱을 요란하게 움직이며 주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과장된 웃음에 듬성듬성 빠진 이 사이로 하층민들의 그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자 그 옆에 있던 귀족 소년은 얼굴을 또 다시금 일그러뜨렸다. 마음이 한껏 불편해진 그는 얼른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행복한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기에, 그곳에 같이 소속되어 있는 아버지의 두툼한 오버코트를 잡아 당겼다.

 "아버지, 이제 가요. 저 배고파요."

 "그래, 가자꾸나. 돈은 데리고 오시는 분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너도 빨리 감사하다고 해. 이 놈아."

 "..."

 "이 녀석, 귀엽구나."

 이번에도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그 소년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이며, 아버지는 흰 이를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옷을 작은 흰 손으로 붙잡고 있는 금발의 아들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빨리 이 기분 나쁘고 더러운 곳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두툼한 입술을 물어 뜯었다.





 그 일로부터 몇 년이 된, 이제 잿빛 코트의 어깨선이 답답할 정도로 꽉 끼어질 즈음. 

 소년은 에이는 겨울 바람에 뿌연 입김을 흘리며 어딘가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 손에 가득 든 책들이 그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흔들렸다. 벌써 7번째 수업. 매일 하는 일과이지만서도 저절로 한숨이 내뱉어졌다. 하루종일 벽난로 앞에 누워서 탄이와 함께 있는다면. 괜한 망상을 해보는 그였지만 그런 일은 추호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추위에 잔뜩 죽은 잔디밭을 부단히 밟아갔다.

 "윤리학의 기본 규념은…"

 소년은 몰아오는 졸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코쟁이 윤리 교수 앞에서 턱이 빠지라 하품을 해댔다. 가는 손가락에 걸쳐있던 만년필조차 요란히 하얀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 교수는 그것들을 전부 못 본 척 하며 혼자서 무의미한 소리를 잘도 지껄여댄다. 다 돈 때문에 저런다는 걸 알기에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죽어도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고개를 돌리니, 창문 밖으로 약하게 흩뿌려지고 있는 눈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눈 내리네."

  하얗게 물들어지는 밖을 보며 작년에 만들었던 눈사람이 떠올라 사색에 잠기는 그였다. 그 날 아침에 바로 녹아 버렸었지.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고리타분한 윤리 교수도 어느새 말을 멈추고 슬며시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본다. 돈 냄새말고 자연에는 관심이 있나 보네. 고약하게 뿌린 향수 냄새가 자신의 코 앞으로 물씬 퍼져, 소년은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응? 뷔 클리프 학생, 무슨 문제 있나요?"

 "속이 안 좋아서."

 "그래요? 그럼 다음에 더 하도록 하고 이만 여기에서 멈추도록 할까요?"

 교수는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신이 난 듯 노래까지 부르며 얼마 되도 않는 짐을 꾸렸다. 그 모습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던 그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수업실을 나갔다. 화난 발걸음으로 복도를 돌아 도착한 계단에는 벌써 붉은 카펫트가 깔려있었다. 그 곳을 내려가면서, 소년은 또 흠씬 마음속으로 윤리 교수를 욕했다. 망할 새끼. 그는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붉게 물들어진 대리석 계단을 뛰듯이 성큼 내려갔다. 바삐 금으로 도금된 문을 열자 얼어붙은 신의 눈물들이 아까보다 배는 따스해진 바람과 함께 자신의 흰 얼굴 사이로 스며든다. 그들을 맞으며, 마음이 다시 가라앉은 그는 책을 품에 꼭 껴안은 채 부츠를 신은 발을 내딛었다.

 밖은 훨씬 더 포근한 온도였다. 벌써부터 삽으로 길을 내는 하인들이 소년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네자 그 인사를 익숙한 듯 받아들이는 그는 스노우볼처럼 아름답게 쌓이는 눈꽃들 사이를 걸어나갔다. 정방향으로는 금방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서도, 시린 눈을 더 맞고 싶다는 어린 마음에 괜히 얼어버린 분수대를 빙글 돈다. 그렇지만 저녁 시간, 6시 반에 늦으면 안되어 그는 실크 장갑을 낀 손을 움직여 목에 걸려있는 회중시계를 열어보았다. 5에서 조금 넘은 금빛 시침에, 소년은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그 금속의 시계를 닫는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쥔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회색 빛깔 눈동자에 잿빛 하늘이 가득 들어온다. 하얀 눈이 그 속에서 만들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들을 움켜쥐려고 하는 그 때. 갑자기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귀에 들어와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거두었다. 저택이 이렇게 소란스럽던 적이 없었는데. 두터운 눈썹을 일그리며 소음이 나는 방향을 돌아 본다. 왠 두 사내가 눈 밭에서 마구 구르고 있다. 멀리 있는데도 귀가 따끔한게 목소리가 둘 다 꽤나 큰 것 같았다. 우리 집에 저런 목소리가 있었던가? 강한 의구심이 생긴 그는 자욱한 눈밭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형체들을 무의식적으로 쫒았다. 가까워질수록 두 목소리가 그에게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집사장의 목소리와 처음 들어보는 맑은 소년의 목소리가.

 "선배한테 자꾸 까불어?"

 "어차피 나 못 자르잖아요."

 "너..너 그런 걸로 사람 협박하는 거 아니다!"

 맨날 냉철하게 사무 용건만 전했던 그의 말투가 그 의문의 소년 앞에서는 흙 묻은 어린아이처럼 개구지길래 흥미가 생긴 그는 조금 더 가까이 그들에게 걸어가기로 했다. 부츠로 눈을 밟는 소리를 최대한 줄여가면서.

 "진 집사님, 드가 백작님께서 부르셔요."

 "아, 그렇다면 가 봐야지요. 너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라."

 겨우 얼굴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거리가 되자, 집사장은 용무가 생긴 듯 서둘러 아버지 담당 시녀를 따라가 금방 모습을 감춘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소년의 검은 뒷 머리칼에 눈이 내려와 송송 박히는 것이 보이자, 그에게 점차 가까워지던 소년은 갑자기 가던 발을 망설였다. 아예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건 15년 인생 이래로 처음이였기에. 게다가 이질감이 드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라니! 진이 있었을 때는 없던 두려움이 샘솟아, 도망치고 싶어진 그는 다시 몸을 왔던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소년의 목소리에 다시 가던 길을 멈추었다.

 "울게 하소서. 내 슬픈 운명을…"

 울게 하소서.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에 소년은 몸에 전율이 돋아 화들짝 뒤를 돌았다. 정작 그 노래를 부르는 검은 머리 소년은 평화로이 눈을 빚으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지만.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에 가득했던 두려움이 소년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부 뒤엎어졌다. 성큼 다시 그를 향해 걸어간다. 이번에는 자박 소리를 내며 서둘리 발을 옮겼다.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천사 같은 목소리를 내는거지. 머릿속에 수없이 떠오르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백작의 아들은 흰 셔츠를 입은 소년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한숨을 짓,"

 빠른 걸음에 벅찬 숨이 하얀 입김을 마구 내뱉으면서 백작의 아들은 백금발 사이 놀란 회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흑발의 소년 또한 잔뜩 동그라진 눈동자로 그런 그를 올려다본다.

 "누구야, 너."

 "..."

추위에 붉어진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지만 소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금발의 소년도 아무런 말 없이 낮설지만은 않은 그를 응시한다. 투명한 검은 눈동자에 도자기처럼 흰 피부, 토끼를 닮은, 자기 나이 또래인듯 한 앳된 얼굴.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계속 뿌연 입김만을 주고 받으며 눈 안에 서로를 담기만 하다, 소년이 어깨 위의 손에 힘을 주자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그 하얀 토끼를 닮은 소년의 눈동자가 불안히 출렁거린다.

 "저. 전.."

 "넌?"

 "도련님, 어디 계세요!"

 저녁 시간이 벌써 다 되었는지 그를 찾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 이의 화사한 얼굴을 보느라 몰랐던 주변도 어느새 어둑해져 별이 내리고 있었다. 늦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시는데. 소년은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말하라며 그를 채근했다.

 "어서!"

 "아. 저는, 정.."

 추위에 언 코 끝이 더 붉어지며 그가 말을 떼자마자,

 "여기 계셨군요. 백작님과 레이디께서 기다리십니다."

 "잠깐만.."

 "지금 바로 안 가시면 혼이 나실 텐데요?"

 아버지의 하인이 용캐 이곳을 찾아 예의바르게 협박을 해 댄다. 참 고맙다. 무어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맑은 목소리를 가진 소년은 달아오른 얼굴을 지닌 채로 부리나케 일어나더니 고개를 한번 푹 숙이고는 도망을 간다.

 "아!"

 태형은 하늘같이 검은 머리칼을 지닌 그가 어둠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낮은 탄성을 질렀다.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백작의 아들, 태형은 (태형은 뷔 포터클리프 드가의 애칭이다.) 자신이 매일 쓰던 일기장에 의문의 그 소년을 본 일을 적었다.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기 어려워 그림을 대충 그려넣었다. 기억이 선명해지는 와중에, 그는 어디에선가 이 사람을 봤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무언가의 확신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기억에 그는 없었다.필기체로 대충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을 적어보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답답한 심장에 씻어 촉촉해진 머리를 잡아 쥐어뜯었다. 그러다 일기장의 페이지가 넘겨져, 자신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부분들이 펼쳐졌다. 누군가 고의로 뜯은 것 같이 거친 절단면으로 도려져 있는 열 페이지 남짓한 부분들. 

"이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나.”

 태형은 무언가 이 소년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직 철없는 소년의 망상인지, 진실일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는 내일 집사장에게 그 소년을 물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어, 토끼 농장을 뛰노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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